본문 바로가기
미술 이야기

네덜란드 화가 램브란트의 생애

by 리아(LIA) 2020. 5. 28.

1.렘브란트의 출생과 집안

1660년 렘브란트는 하르멘 헤리츠 반 레인과 넬트헨 빌렘스드르 반 쥐트브라우크의 아홉번째 아들로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렘브란트의 아버지는 가족 소유의 제분소를 물려받은 중산층이었고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제빵업자의 딸이었지만 레이덴(옛 지배계급)의 '레전트'와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1566년부터는 그 도시의 공식 종파가 된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2.렘브란트의 도제 시절

렘브란트의 일대기는 레이덴의 시장을 지낸 얀 얀즈 오를레르스가 남긴 "레이덴 시의 모습"에 처음으로 소개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렘브란트의 부모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라틴어 학교에 입학시켰으나 그는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은 학교에서 중퇴한 렘브란트는 그의 바람대로 한 화가에게 도제로 보내졌고 미술의 기초와 원리를 배우게 되었다.

 

1)반스바넨 부르크의 도제:3년

당시 네덜란드에서 화가는 존경받는 직업이었고 렘브란트는 반스바넨 부르크의 도제로서 3년을 보냈다.  

렘브란트는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자기 작품에 서명할 자격도 없었기 때문에 도제 시절의 작품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도제들은 스승의 스타일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화가들의 길드조직에서는 그림의 질과 가격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길드 조합비를 내는 독자적인 스승으로 성장할 때 까지는 어떤 화가도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팔 수 없었다.

 

2)라스트만의 도제:6개월

반스바넨 부르크의 도제로 3년의 세월을 보내고 렘브란트의 아버지는 더 훌륭하고 강도높은 교육을 위해서 아들을 라스트만에게 다시 도제로 보냈다. 라스트만은 프로테스탄트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에서도 가톨릭 신앙을 지켰지만 당시 가장 존경받는 화가중 한사람이었다. 1600년경 네덜란드 역사화는 남성과 여성의 나신을 다양한 포즈로 묘사하는데 주력했으며 후원자들과 화가들은 그리스 신들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라스트만은 1614년에 그린 "제단에서 논쟁을 벌이는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지중해 풍경과 전통적인 건축물을 배경으로 로마의 부조 기법을 사용하여 완벽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렘브란트는 6개월가량 라스트만 옆에 머무른 후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3.렘브란트의 홀로서기

라스트만의 도제로 6개월을 보낸뒤 그는 레이덴으로 돌아와서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라스트만의 화풍과 주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4.렘브란트 그림의 특징

 

1620년대 네덜란드 대다수 화가들은 시골의 헛간, 거지와 농부, 청어와 빵으로 차린 간소한 식사등의 소박한 주제를 즐겨 그렸다. 이러한 주제들은 종교적 인물을 형상화하는 것을 삼갔던 프로테스탄트 문화에서도 쉽게 용인되어 예술시장을 급속히 확산 시켰다. 이러한 환경과는 차별화 되게 렘브란트가 1620년대에 그린 작품의 절반 가량은 노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늙은 수전노, 늙은 토비트와 안나,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예언자들과 사도들 등의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는 "토비트와 어린 양을 안고있는 안나"라는 그림에서도 특유의 섬세한 표현으로 각광받았다. 눈가의 깊은 주름과 창백한 살갗, 얼룩진 피부, 검버섯등으로 표현해낸 노인의 모습은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1631년 말 부터 그는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초상을 연이어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는 니콜라스 엘리아즈같은 화가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어서 경쟁이 상당했으나 음영의 뚜렷한 대조, 옷감의 섬세한 결 표현, 얼굴과 손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빛 등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 낸 덕에 주목받는 초상화가중 한사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632년 렘브란트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강의"를 그리면서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외과의사 길드에서 핵심 강사였던 툴프는 때때로 길드의 해부학 강의실에서 사형당한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해부했다. 해당 작품에는 해부에 참여한 여덟사람의 얼굴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명암효과, 붓질의 교묘한 변화로 전경에서 배경까지 공간적 깊이를 주면서 동시에 해부라는 주된 행위를 강조했다. 즉, 툴프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의사들은 간략하게 처리한 전통적 기법을 사용한것이다.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던 많은 예술가들과는 다르게 렘브란트는 예술성도 인정받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630년대 후반까지 렘브란트는 많은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작품들에서는 뿌리째 뽑힌 나무들과 불길해보이는 하늘을 특징으로 하였다.

1640년 부터 그의 작품은 활기가 줄어들고 차가운 느낌을 준다.

프랑스의 예술평론가 장바티스트 데샹은 렘브란트에 대해 "그는 자유와 그림과 돈만을 사랑했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1650년대 렘브란트의 스타일은 초기 작품과는 다르게 빛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후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성경적 주제가 자주 묘사되었으나, 자화상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미국의 주목할 만한 렘브란트의 그림 컬렉션은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과 프릭컬렉션,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 보스턴의 미술관, 로스엔젤레스의 J.폴게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세계적인 국립미술관인 레이크스 미술관(Rijksmuseum)은 렘브란트 뿐만아니라 베르메르, 위스달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미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  (0) 2020.05.29
로코코 예술(Rococo art)  (0) 2020.05.29
바로크 예술(Baroque art)  (0) 2020.05.29
모더니즘의 정의 및 특징  (0) 2020.05.28
예술의 기원  (0) 2020.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