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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바로크 예술(Baroque art)

by 리아(LIA) 2020. 5. 29.

바로크 예술(Baroque art)

바로크양식이란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에스파냐 등으로 번져갔고 바로크 예술의 분야는 유럽에서 번성했던 건축, 음악, 무용,회화, 조각 등으로 범위가 넓었다. 바로크 양식은 대비,움직임, 깊은 색채등을 특징으로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코코(Rococo)라고 불리는 양식으로 진화하였다.

 

바로크(Baroque)의 어원

바로크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라틴어 Verruca에서 접미사 ocu(cucu)가 변형되어 바로크라는 단어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중세 라틴어인 Baroco가 어원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바로크라는 단어는 18세기 이전에 불규칙한 진주와도 연관이 있는데 찰스 5세의 보물 목록에 있는 진주를 묘사할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불완전하게 둥근 진주에 사용했던 단어인데 예술의 성질을 묘사할때도 사용이 되었고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크 음악은 조화가 혼란스럽고 변조나 불협화음이 많은 것을 특징으로 하며,

건축 분야에 있어서는 메토디크 백과사전에서 Quatremer de Quincy에 의해 "고도로 장식되고 괴로워하는 건축 양식"으로 정의 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은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였는데 르네상스 건축은 순수한 고전부흥의 요소를 담고있어서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바로크는 전통에서 자유롭게 벗어나는 시도였으므로 르네상스 예술의 타락으로 보기도 했다.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여행객이라면 대부분 들리는 명소로 TV등의 미디어 매체에서도 소개된 적이 많은데, 베르사유 궁전이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 예이다. 원래는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 외관을 U자형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에 재 증축을 하고 정원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고 이름을 붙인 후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2016년도에 프랑스 니스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한 바 있어서, 베르사유 궁전 뿐만 아니라 성당 등의 명소를 입장하기 전 소지품 검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한다. 이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줄을 서서 대기하고 짐 검사를 받는 시간등을 고려햐여 여행 스케쥴을 짜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베르사유 궁전은 강력한 왕권에 대한 증거로 건축시 피라미드 건설 만큼이나 인원을 동원했다고 한다. 20여년의 착공끝에 1682년 베르사유 궁전의 낙성식이 열리고 왕과 궁정인들이 이주해서 생활하게 되었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거울의 방'에 수백 개의 촛불을 밝히고 정원의 나무도 온통 촛불로 장식하여 그 화려함을 더했다. 그 곳의 화려한 생활은 유럽 각국 군주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사치와 낭비로 대표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 왕권을 바탕으로 절대군주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문화 예술 사업을 추진했다.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엘에스 코리알 궁전을 신축했고 왕실은 패션과 사라반데 춤,로페 데 베가의 연극으로 화려함을 강조했다. 바로크 건축은 식민지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졌다고 한다.

바로크 예술의 목적은 미학+정치이다. 예술은 왕권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인 동시에 귀족들을 회유하는 수단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오페라, 발레,연극 같은 공연 예술이 발전되었는데 이는 귀족들이 역모를 꾸미지 않도록 직책을 주고 무도회나 공연예술로 관심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바로크 연극

공연 예술이 번성하면서 연극은 문학에서 중요한 장르로 떠올랐는데 문학가가 되기 위해서는 극작가가 되어야 했다. 루이14세 시대에 궁정에서 성공한 극작가들은 대개 법관,상인, 관리 같은 시민 계층에서 배출되었다. 1663년에 아카데미는 60명의 문학가를 선발해 연금 제도를 실시 했다. 루이 14세가 죽고 귀족들이 예술의 수요자로 등장하면서 왕궁을 대신해서 살롱이 문학가들의 입신 출세 통로가 되어 문학가들은 후원자의 눈에 띄기를 기대하며 살롱에 출입 하곤했다.

몰리에르는 독실한 신앙인을 가장한 사기꾼을 소재로 한 "타르튀프"(1664)를 써서 교회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교회에서 해당 연극을 상연 금지 했지만 몰리에르는 루이14세의 비호 아래 공연을 재개 할 수 있었다. 그는 1665년에 왕실 극단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에는 궁정인들을 위해 공연을 하였다. 왕의 후원을 기반으로 하였고 몰리에르의 희극에는 당대의 부르주아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르주아 귀족"(1670)에 나오는 주르댕은 귀족들의 사교계에 끼어보려고 돈을 뿌리지만 예절을 배우기 위해 고용한 선생들은 그를 농락하기만 한다. 귀족관객들은 귀족흉내를 내려다 망신당하는 졸부를 웃음거리로 삼았고 몰리에르는 시민계급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하되 사회적 위계 질서를 넘어서는 내용을 연극으로 삼지는 않았다. 

 

 

바로크 음악가 :궁정음악가와 교회 음악가

 

국왕이나 대귀족은 오케스트라와 예배용 성가대, 오페라 가수를 거느리고 잇었는데 그 숫자는 곧 궁정의 부를 상징했다. 바흐는 250편의 오르간 곡, 300편의 칸타타, 실내 음악 등에 걸친 작품을 썼다.

궁정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음악가들은 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음악가들은 대부분 성가대 단원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성가대, 작곡가, 예배음악 반주자를 필요로 했다.) 교회 음악가는 보수가 적어서 교회의 사무를 보거나 교회 부설 학교 교사를 겸직해야 했다.

 

예를 들어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은 영국에서 "왕궁의 불꽃놀이"(1749)를 연주할때 백명이 넘는 오케스트라를 동원했다고 한다. 

헨델은 40편의 오페라, 21편의 오라토리오를 비롯해 종교음악, 실내음악, 성악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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