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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

by 리아(LIA) 2020. 5. 29.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1452~1519)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국내에서는 모나리자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천재화가로 유명하지만 그는 그림이나 조각 건축 뿐만 아니라

문학, 해부학, 지질학, 천문학, 식물학, 고생물학, 공학, 수학등의 폭넓은 학문에 있어서도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이탈리아 피에로 다빈치라는 공증인과 농부 카타리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교육을 받았다. 

초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제자로서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일을 하였으나,

차츰 그림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어느날 스승인 안드레아 델 베르키오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다 빈치는 스승의 그림 귀퉁이에 천사를 그려넣었다. 다 빈치의 천재성을 본 스승은 깜짝놀랐고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조각에만 열중하게 되었다는 일화는유명하다.

다빈치는 공방에서 그림을 배울때 스승 뿐만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을 볼 수있었고 그 작품들의 섬세한 선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 빈치는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기법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피렌체의 정식 화가 회원이 되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1435~1488)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으로 제자인 레오나르도가 본인보다 회화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이후로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조각에 전념하여 청동상, 조각상 제작등으로 뛰어난 미술작품을 남겼다.

특히, 피렌체 대성당의 꼭대기를 장식한 구리 구를 제작하여 명성을 얻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천재 또는 르네상스 맨의 대표라고 칭한다.

미술사학자 헬렌 가드너에 따르면 그의 관심의 범위와 깊이는 기록된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다 빈치는 30세가 되자 피렌체보다 더 큰 밀라노로 옮겨서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았는데

밀라노는 피렌체보다 예술과 과학,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다.

다빈치는 스포르차 공작의 전속화가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군사기술자로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다 빈치는 공작의 가문에 머물면서 다양하고 많은 학자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교류를 하며

식물학, 광학, 천문학, 해부학등 온갖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학식을 가꿔나갔다.

이 시기에 다 빈치가 제작한 작품이 "최후의 만찬" 이었는데 이 작품은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 성당의 식당 벽면에 그려졌다.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

모나리자가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에 화가의 주된 관심은 인물 재현이었다.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여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 당시의 심미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빈치 역시 의뢰인으로 부터 의뢰받아 모나리자를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모나리자의실제 모델은 조콘도라는 비단교역상의 아내 엘리자베타이다.

다빈치는 그 상인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출산선물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아름다우면서도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그 미소는 완벽한 행복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화로운 균형이 큰 몫을 한다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미소는 다빈치가 자신의 미소를 재현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스푸마토(Sfumato)

"연기와 같은"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의 형용사로 회화에서 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리는 명암법에 의한 공기원근법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명명한 기법으로 바르톨로메오, 안드레아 델 사르토, 코레지오 등도 해당 화법에 영향을 받았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erea del sarto)는 다 빈치의 정교한 스푸마토 기법과 부오나로티의 고전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여

섬세한 그림들로 피렌체의 대표적인 종교화가로 남았으며,

프랑수아 1세, 교황레오 10세처럼 신분이 높은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동등하게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탈리아 예솔로 모래 조각 축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의 정교함을 담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하여 세밀하게 스케치 하여 본질에 접근하려 노력했다.

시체 한구당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사용하며 꼼꼼히 관찰하고 스케치로 남겼는데 모나리자의 미소는 안면 근육구조의 이해로 나올 수있었던 위대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타고난 천재성과 노력을 다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9년 5월 2일 예순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고 누구보다 뜨겁게 노력하며 살았다고 보이나,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라고 한탄했었다고 한다.

그가 보다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대작들이 남았을지 상상하면 천재 예술가의 죽음은 몹시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이런 그를 추모하는 축제가 이탈리아 예솔로(Jesolo)에서 2019년에 열렸는데 다빈치의 죽음 5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모래조각 전시를 열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매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살고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되는데, 다빈치 정도의 뛰어난 발자취를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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