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 양식(Rococo style)
로코코양식은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장식성이 강한 미술의 경향을 말한다. 17세기의 바로크와 19세기 신고전 주의의 가운데 나타난 사조로서 로코코 양식의 과도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건축 영역에서 유행한 양식으로 루이 15세가 통치하던 시대라서 루이15세 양식으로도 불린다.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로 보지는 않는다.
로코코는 19세기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에 의해 고안된 단어로 조약돌(rocaille)+조개 껍데기(coquile)를 변형해서 만든 단어이다. 로코코는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바로크가 왕실의 예술이라면 로코코는 귀족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로코코는 우아하고 섬세하면서 강한 장식성을 특징으로 하여 즐거움을 추구하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했다.
근대 사회의 지배 계층인 중산층은 왕과 귀족들의 예술인 바로크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산층은 귀족들의 사치, 과시 욕구 비판하면서 자신의 절제, 근면성을 대조하여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오페라, 발레, 로코코 양식의 가구, 집기 같은 것은 중산층 문화로 이전되었다.
이 시기에는 건축물 보다는 회화에 비중이 더 강해졌으며 이전에는 왕조를 표현하는 역사화나 초상화가 유행했다면, 로코코 하에서는 귀족들이 유희를 즐기는 풍속화가 유행했다. Antonie Watteau,Francois Boucher, Jean Honore Fragonard등의 풍속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음악에 있어서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초기음악이 로코코 양식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도 비극이 아니라 연애라는 주제의 희극이 자리를 잡았다. 산문으로 된 소설도 발전했는데 그 당시는 소설이라는 장르, 명칭 조차 없었다. 에로틱하고 감각적인 소설이 유행했는데 "마농 레스코"(1731)은 발레, 오페라, 영화 등으로 각색되었다. 이는 성직자가 될 하급귀족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데 여자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하급귀족 청년을 배신하는 사랑이야기이다.
*마농레스코(Manon Lescaut,1731)
마농레스코는 프랑스의 소설가 아베 프레보의 대표작으로 반자전적 소설이다. 아베 프레보는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군입대 후 영국으로 건너갔고 나이가 들고 귀국하여 1731년 "한 귀부인의 수기" 30권을 썼다. 그 중에서 유명한 "마농 레스코"는 7권에 해당한다.
바로크(Baroque)와 구별되는 로코코(Rococo)의 특징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만들어진 조개 껍질과 암석을 이용한 무덤을 로카유라 불렀는데 여기서 유래 한것이라고 한다. 바로크시대의 궁전건축이 장엄했다면 로코코 시대는 부드러운 곡선형태의 우아한 느낌의 건축물이 주를 이루었다.
로코코는 꽃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장식으로 활용했으며, 따뜻한 파스텔 색감을 주로 사용했다.
부분적으로 대칭을 포기하고 곡선으로 건축물등을 구성하면서 우아함을 강조했다.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
로코코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은 상수시 궁전으로 1748년 건축가 한스 게오르크 벤체슬라우프 폰 크노벨스도르프에 의해 지어졌다. 독일 포츠담 외곽의 언덕에 당시 왕인 프리드리히가 왕실의 별궁을 목적으로 건축을 지시했다. 코린트식 벽 기둥은 현관과 내부의 대리석 홀에서도 디풀이해 나타나는데 이 대리석 홀은 상수시 궁전의 심장부이다. 프랑스어로 근심 없는 궁전(Palais de Sanssouci)란 뜻이며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것이나 실내 장식은 로코코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의 주요 관광명소가 되었다.
로코코 양식의 쇠퇴
로코코양식은 루이 16세 재위 당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고 대중적으로 사치, 낭비 향락으로 프랑스의 재정을 낭비한 여왕이라는 악명을 받고있는 마리앙투아네트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 라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대사로 유명한데 사실은 마리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 당시 정부에 대한 전 국민적인 반발심이 거셌고 대중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는 현대적 해석도 있다. 2019년 하반기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의 뮤지컬 공연이 있었는데 올해는 코로나 여파때문에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짐작된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모든 분들의 삶이 정상화 되고 문화 예술 공연도 마음 편하게 보러 다닐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마리앙투아네트의 삶은 뮤지컬, 영화등을 통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재 조명되고 있다. 18세기 후반의 사회적 상황으로는 거듭된 자연재해, 식료품 가격 폭등, 국가 재정 파탄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극으로 달아있을 때였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고 왕실가족은 몽메디로 도주에 실패하였다.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에 처형된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10월 15일에 사형판결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고대에 대한 동경을 담은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e)이 나타나게 되었다.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여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바탕으로 균형잡힌 구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조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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